본문 바로가기
웹과 모바일

야구심판과 유니버셜 디자인

by mindfree 2010. 10. 8.
얼마 전 트위터에서 놀라운 글을 읽었다. 야구장에서 심판이 판정을 내릴 때 입으로 판정을 외치면서 동시에 수신호를 하기 시작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한 한 명의 청각장애인 야구선수. 그 선수를 위해 스트라이크, 세이프 같은 판정을 손으로도 표시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단순히 '폼나게' 하려는게 아니라 경기장에서 뛰는 다른 선수를 위한 배려에서 출발했다는 게 너무나 감동스러웠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배려에서 출발한 야구 심판의 수신호
청각장애인을 위한 배려에서 출발한 야구 심판의 수신호
Copyright by Malingering (CCL :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냥 감동이 있는 얘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야구 심판의 수신호에는 유니버셜 디자인의 기본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유니버셜 디자인은 장애, 연령에 상관 없이 모든 사람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편하게 이용하도록 디자인하는 것을 말한다. 이 관점에서 야구 심판의 수신호를 들여다보면 어떨까. 청각장애인을 위한 심판의 수신호는 몇 가지 추가 기능(?)이 있다. 우선 경기를 관람하는 관중이 멀리서도 심판의 판정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시합에 참가하는 선수, 코치 역시 마찬가지다. 심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도 판정을 알아보는데 어려움이 없다. 여기에 더해 폼도 난다. 그냥 소리만 지른다고 생각해보자. 밋밋하잖아. 장애인을 위해 수신호를 하기 시작했지만, 그 혜택은 비장애인도 같이 누리는 셈이다.

이런 디자인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 키보드를 살펴보자. 모든 키보드의 'ㄹ(F)'키와 'ㅓ(J)'키에는 조그맣게 도드라진 부분이 있다. 시작장애인이 타이핑을 할 때 양손 집게손가락 위치를 잡기 쉽도록 하려고 표시한 요철이다. 그러나 타이핑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알겠지만 이 요철은 굳이 시각장애인이 아니라도 꽤 유용하게 쓰인다. 나만 해도 이 부분이 닳아 없는 키보드를 만나면 손을 올려놓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면서 무의식 중에 이 요철을 손끝으로 더듬어 찾는다는 뜻이다.

장애인을 위한 편의기능이지만 좋지 않은 사례가 있다. 몇 년 전까지 서울 지하철에 있던 휠체어 승강기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휠체어 승강기 옆에 달린 버튼을 누르면 직원이 나와서 승강기를 작동해 계단을 오르내리도록 한다. 그러나 각종 언론 매체, 특히 방송이 휠체어 승강기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모두 철거되고 말았다. 이 승강기는 모두 잘 알다시피 속도가 너무 느린데다, 장애인 혼자 사용할 수 없다. 장애인을 위해 큰 돈을 들여 설치했지만 사용이 너무 불편해서 아무도 쓰지 않는 천덕꾸러기로 변했다. 이후 설치한 앨리베이터는 휠체어 승강기의 단점을 깔끔하게 극복했다. 앨리베이터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 뿐만 아니라 다리 힘이 약한 어르신과 많은 짐을 옮겨야하는 승객까지 모두 이용한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위해 설치하는 경사로 역시 마찬가지다.

유니버셜 디자인의 또 다른 예는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에 있는 도서관은 휠체어가 다닐 수 있을만큼 서가 간격을 확보해야 하는데, 이 간격이 법으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이렇게 간격을 확보하면 체구가 큰 사람도 불편 없이 다닐 공간이 생긴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도서관이 있다면 이 법령이 조금 야속할테지만, 덕분에 이용자는 좀 더 편하게 도서관을 쓸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규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장애인차별금지법에 포함되어 있으려나?)

최근에 참여한 웹사이트에 시각장애인용 기능을 설치한 적이 있다. 시각장애인용 기능을 켜면 화면 상단에 텍스트 메뉴와 함께 음성 서비스를 시작하는 방식인데, 프로젝트 종료 시점에 다급하게 제작하느라 결국 비장애인에게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는 기능이 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플래시를 많이 사용한 사이트라 이 기능을 좀 더 적절하게 제공하면 비장애인도 편하게 이용하도록 도움을 줄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다.

이제 우리 주위에도 서서히 장애인을 위한 편의 기능이나 장치가 생기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을 위한 편의기능을 제공한다고 너무 거기에만 집중하면 반쪽짜리 결과물을 얻는 경우가 많다. 장애인을 위해 만든 편의기능이 오히려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에게 불편하거나 비장애인은 아무런 혜택도 얻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디자인이라 하기 어렵다. 장애인을 위한 디자인을 해야 한다면 야구 심판의 수신호를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