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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웨스트윙에 나오는 숫자 272의 의미는? -1편

by mindfree 2010. 7. 11.
최근 치뤄진 지방선거는 그야말로 이변의 연속이었다. 각 지역의 전통적인 강자들이 줄줄이 낙선하고, 서울은 강남 몇 개 구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민주당으로 넘어갔으며 현직 서울시장인 오세훈 후보가 한명숙 후보의 예상치 못한 선전에 개표 막판까지 승패를 알 수 없는 상황에 치닫기도 했다. 나 개인으로서도 이번 선거는 아마도 여태 치뤄진 지방 선거 중 가장 관심을 가진 선거였던 탓에 선거일 밤 늦게까지 깨어 결과를 지켜봤다.

그와 동시에 몇 년 전에 DVD세트를 구입한 웨스트윙에 다시 관심이 갔다. 미국의 정치 1번지인 워싱턴 DC와 백악관을 배경으로 한 숨가쁜 드라마에 끌렸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을 뿐더러, 극중 등장한 미국 대통령 선거의 모습이 다시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조금은 희미한 기억이 됐지만,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 투표 수에서 이기고도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부시 5045만 6141표, 고어 5099만 6039표로, 고어가 약 55만표 많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있고 말이지.

우리나라의 대통령 선거 방식으로 생각하면 2000년 미국 대선의 결과는 아주 심각하게 말이 안된다. 최다 득표를 했는데 대통령에 뽑히지 못한다니, 말이 안되잖아. 당시 언론에선 '선거인단 제도'에 대해 꽤 여러 차례 얘기를 했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흠, 하여간 희한한 나라야' 했을 뿐 그 이상의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미국은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는단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말았다.

이후 내용에는 지금 웨스트윙을 보고 있는 분이라면 스포일러가 됨을 알려드립니다. 6시즌에서 조쉬가 '매튜 산토스'라는 하원의원을 설득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고, 이후 대통령 선거운동을 진행하는데, 제가 이 글에서 그 선거 결과를 그냥 까발릴 거거든요. 물론 7시즌 1편에서 살짝 결과를 암시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만. 암튼 판단은 각자의 몫.



미국 드라마 <웨스트윙 The West Wing>의 7시즌 17번째 에피소드 '선거일 part2' 중 한 장면


그럼 드라마 웨스트윙으로 돌아와보자. 위의 이미지는 웨스트윙의 마지막 시즌인 7시즌 중 한 장면이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산토스 후보 진영의 캠페인 매니저(우리 식으로 하면 선거위원장 쯤?)인 조쉬가 개표가 끝난 뒤 혼자 사무실에서 선거 결과를 표시한 보드에 '272'라는 숫자를 적고 있다. 전국민이 투표를 했는데, 결과로 적는 272라는 숫자는 뭘까? 이 외에도 이번 에피소드에는 '남은 몇 표가 당락을 결정한다' 혹은 '`11표를 얻어야 한다'는 알쏭달쏭한 숫자들이 계속 등장한다. 이 때 등장하는 숫자는 어떤 의미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조쉬가 적고 있는 272라는 숫자가 바로 조쉬의 진영에서 획득한 선거인단의 표의 합계다. 미국의 선거인단은 총 538명이며, 이 중 과반수인 270표 이상을 얻어야 대통령 선거에 당선될 수 있다. 당선의 분기점이 되는 숫자라는 의미에서 이 270을 '매직 넘버'라고 부른다. 538명의 선거인단은 기본적으로 각 주의 인구 분포에 비례해서 배정(정확히는 각 주의 하원의원 수+상원의원 수)되며, 따라서 캘리포니아주처럼 55명의 선거인단을 배정받는 주도 있고, 메인주처럼 4명의 선거인단을 배정받는 주도 있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바로 이들 538명의 선거인단이 투표를 해서 당선된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간접선거를 기본으로 채택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쯤에서 혼란이 생긴다. 잉? 그럼 국민투표는 뭔데? 간접선거래매? 그건 그렇고, 아니 대통령을 왜 간접선거로 뽑아? 우리나라도 6.29 선언으로 직접선거로 바꿨잖아? 우리보다 훨씬 이전에 민주주의와 대의 선거 제도를 만든 미국이 아직 간접선거를 한단 말야?

이런 의문을 이해하려면 미국의 정치 역사에 대한 이해가 살짝 필요하다. 왜 미국 대통령 선거에는 다른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선거인단이라는 제도가 생겼으며, 아직까지 그걸 유지하고 있는 걸까. 결국 그 제도 때문에 국민의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하는 결과를 내면서도 그 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애초에 선거인단이라는 제도는 왜 생겼나? 그 이유를 알아보자.

첫 번째 키: 미국은 13개의 주에서 출발했다.

미국의 정식 명칭은 United States of America이다. 우리가 '미합중국'이라고 하는 이 나라는 50개의 주정부가 모여 하나의 연방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형태이다. 지금은 50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지만, 미국이 처음 출발할 때는 13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경상도와 충청도가 서로 각자의 정부를 구성하고 있다가 이들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정부를 다시 구성하기로 했다는 얘기다. 여기에 전라도가 합세하고, 다시 강원도가 합세하고, 경기도가 뒤이어 따라오고 마지막으로 제주도가 합세하면서 대한민국이 되었다는 걸로 이해하면 된다. 바꿔 말하면 만약 '제주도가 어떤 이유에서 삐치면' 연방정부에서 탈퇴해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맨 처음 13개의 주정부가 모여 연방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하면서, 각 주는 자신들의 입장을 대표하는 대표자를 연방정부에 보내고 싶어했다. 이 때 어떤 놈은 각 주마다 한 명씩 보내자고 하고 어떤 놈은 인구가 많은  주는 더 많이 보내야 할 것 아니냐고 의견이 분분했다는 말이지. 그래서 내놓은 타협안이 바로 하원의원은 인구 수대로 보내고, 그 대신 상원의원을 주의 인구 수에 상관 없이 2명씩 배정하는 안이다. 이런 토론의 결과로 미국은 100명의 상원의원과 435명의 하원의원으로 의회를 구성하게 됐다. 엇 그럼 535명이잖아? 선거인단은 538명이라며? 여기에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워싱턴 컬럼비아 특별구) 상, 하원의원 3명(하원 1, 상원2)을 더한다. (이 3명이 추가된 것은 1961년으로, 비교적 최근이다) 그래서 미국의 상하원 의원의 수는 538명이다.

두 번째 키: 미국은 노예제가 있는 나라였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 노예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오랜 기간 동안 미국은 노예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퍼슨 같은 양반들도 노예는 제대로 인간취급을 안했는데, 그러니 노예들에게 투표권을 줄리가 없었다. 아 물론 그 때는 일반 시민도 재산이 없으면 투표권이 없던 시기였다. 그러니 노예 따위야. (야만적이라고? 같은 시기에 우리는 왕이 나라를 지배했다는 걸 떠올려보자. 투표?)

그럼 노예제가 왜 이슈가 됐느냐. 당시 정치인들은 노예를 제대로 된 사람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이들을 인구비례에는 넣고 싶어 했다. 그래야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의원을 연방정부에 보낼 것 아닌가. 자고로 머릿수가 많으면 일단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이다. 그래서 하원의원의 수를 정하는 배경인 인구 수에는 노예의 수를 포함하고 (지금까지도 말이 많은 3/5 제도. 노예는 시민의 3/5으로 카운트한다는 제도) 이들에게 투표권은 주지 않았다. 하원의원의 수를 확보하기 위해서 노예의 수를 인구 수에 포함해 놓고는, 한 편으로는 노예의 투표권을 인정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이익이 될 땐 인정하고 그렇지 않을 땐 인정을 안한 거지. 해서 이들은 상, 하원의 수와 동일한 538명의 선거인단을 각 주정부에서 각자 알아서 뽑은 다음, 이들에게 대통령을 선출할 권한을 줬다.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다는 대전제는 합의한 뒤, 선거인단을 뽑는 방식은 주정부에 자율성을 준 것이다.

세 번째 키: 선거인단 제도의 변화

물론 처음에는 각 주의 선거인단을 뽑아 이들이 각자 원하는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을 것이다. 공화당의 선거인은 공화당 후보에게 표를 보내고, 민주당 선거인은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보냈든 어쨌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각 주는 점점 국민투표에서 최다 득표를 한 후보에게 해당 주의 선거인단의 표를 몰아주는 방식으로 변해갔다. 이는 양 정당이 그 편이 서로에게 더 이익이 된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시작된 현상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가령 캘리포니아 주를 민주당이 장악했다면(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캘리포니아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을 걸로 예상한다면), 민주당 입장에선 선거인단 55명의 표를 민주당이 죄다 갖는 것이 40명의 표를 갖는 것보다 낫다. 그럼 공화당은 캘리포니아에서 0표잖아? 공화당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텍사스 주가 조금이라도 공화당이 강세를 보인다면, 공화당 역시 텍사스 선거인단 32표 중 25표를 얻는 것보다는 32표 모두를 가져가는 것이 낫다. 아울러 개별적인 주의 입장에선 자신의 주의 선거인단 표를 모두 한 명에게 몰아주는 것이 대통령 후보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런 이유로 선거인단 제도는 자연스럽게 해당 주에서 가장 많은 득표를 한 대통령 후보에게 전 선거인단의 표를 몰아주는 '승자독식' 방식으로 변해갔다.

자, 그럼 이 선거인단 제도를 포함해서 미국 대통령 선거가 어떤 순서로 치뤄지는지 대충 알아보자. 일단 각 당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설 지명자를 뽑는다. 이 때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는데, 어떤 주는 예비선거(각 당 후보자들끼리의 선거)를 통해 지명자(정확히는 대의원)를 뽑고, 어떤 주는 당원대회를 열어 지명자(역시 정확히는 대의원)를 뽑는다. 이 방식도 민주, 공화 양당이 조금씩 다르며, 각각의 주마다 다르다. 2004년의 경우 민주당은 35개의 주에서 예비선거를 했고, 공화당은 32개의 주가 예비선거를 했다. 왜 '지명자(대의원)' 같은 헷갈리는 표현을 쓰느냐. 미국은 예비선거에서조차 각 후보에게 가는 표를 바로 계산해서 지명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 각 후보에게 가는 표를 계산해서 그 후보를 지지하는 대의원의 수를 할당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 때 각 대의원은 이미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공언한 상태이기 때문에(이들이 미리 공언한 지지후보를 바꾸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바꿨다간 지역에서 매장되니까), 대의원의 수가 곧바로 자신이 얻을 득표수로 연결된다. 이후 대개 7월과 8월에 전당대회를 열어 전국의 대의원이 한 자리에 모인 다음, 이들이 각 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자를 선출한다.

그리고 나서야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대통령 후보 지명자들이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한다. 이들은 11월 초까지 선거운동을 한 뒤, 11월 초에 (뭐 첫 째 월요일 다음 화요일인가 그렇다) 전국민이 이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한다. 이 때 이미 각 정당은 자신들의 선거인단을 선정해서 공개해둔 상태인데, 이들은 12월 둘째 주에 열리는 선거인단 투표에서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진다. 내가 가장 헷갈리는 것이 이 대목이다. 국민투표를 하고 선거인단이 다시 투표를 한다고? 대개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해놓는 바람이 헷갈리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이거다. 국민들은 물론 대통령 후보에게 투표를 한다. (이 때 각 후보가 속한 당의 선거인단 명부를 투표용지에 적은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고 한다) 대통령 후보는 각 당이 선정한 선거인단과 연결되어 있다. 가령 캘리포니아 주에서 100명의 유권자가 있는데 이 중 55명이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면, 캘리포니아주의 선거인단은 전원 민주당에서 선정된다. 이렇게 민주당에서 선정된 선거인단이 12월에 각 주의 주도로 가서 대통령 후보에게 투표를 한다는 얘기지. 그럼 민주당 선거인단이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던질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느냐? 사실 이들이 반드시 자신이 속한 당의 후보에게 표를 던져야 한다는 강제 규정은 없다. 그러나 선거인단이 아주 신중하게 선정이 되기 때문에 이들이 자신의 당을 배신하는 투표를 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으므로, 민주당 선거인단의 표는 모두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게 가게 되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미국 대통령 선거인단의 '승자독식 방식'이다.

참고: 1948년 이후 다른 당의 후보에게 투표한 선거인단 위원은 9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중 대부분은 실수였다고.

따라서 실제로 미국의 대통령은 11월에 정해지고, 12월의 선거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용히 치뤄진다고 한다. 그러나, 2000년 선거에서 이 방식에 문제가 생겼다. 앞서 말했다시피 국민투표 득표수에서는 이겼음에도, 선거인단의 수에서 지는 바람에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미국 역사에서 4번 일어났으나 3번은 100년도 넘은 예전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100년만에 처음 벌어진 일이라 봐도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 조금만 생각해보면 답은 나오는데, 오늘 저녁에 축구를 보러 가야 하는 관계로 이번 글은 여기까지.

다음 글에서는 전체 득표수에서 이기고도 선거인단 수에서 밀리는 이유와 실제 2000년, 2008년의 선거를 통해 미국 대통령 선거 전략의 기본을 얘기해보자. 아울러 이런 희한한 방식을 개선하자는 목소리에 대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