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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등등

생명보험사의 전화

by mindfree 2010. 3. 9.
2000년도에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라이나 생명보험의 웹사이트를 제작했다. 당시 업계 최초로 온라인 가입을 받은 웹사이트로 기억한다.

이 프로젝트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 (언제나처럼 시작부터 옆으로 새는...) 평소처럼 잠시 커피 한 잔 마시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데, 다른 방에 있던 몇 명의 개발자가 따라나왔다. 개발팀이 있던 방 앞을 지나치면서 보니 왠 아주머니 한 분이 의자에 앉아 있고, 그 앞에 그 사이트의 개발을 맡았던 개발자 한 명이 화이트 보드에 뭔가를 열심히 써내려가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밖으로 나와 '저게 도대체 무슨 풍경이냐?'고 개발자들에게 물으니 '보험 아줌마가 왔는데, 그 분이 설명하는 보험 가입 조건 등을 듣던 그 개발자가 아줌마가 잘못 알고 있다며 설명을 시작했다'는 거다. 보험료 요율, 예상 보험료 산정 서비스 등을 직접 개발하면서 보험 아줌마보다 보험에 대해 더 잘 알게된 그 개발자는 사이트 오픈 이후 라이나 생명보험으로 직장을 옮겼다 -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내가 퇴사한 뒤에.

아무튼 그 때 사회에 나와 최초로 보험에 가입했다. 월 몇 만원의 보험료를 내고. (아마 처음엔 이만 몇 천원 정도를 냈던 듯) 이후 2006년까지 보험료를 매달 내다가 2006년 미국에서 입국한 뒤에 해지했다. 단 한 번의 보상도 받지 못하고, (그 기간 동안 나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내가 낸 돈의 아주 일부만 되돌려받았다. 해지를 위해 전화를 했더니 상담원이 나중엔 화까지 내더라. '이제 암보험 점점 없어지는데 왜 해지하려는 거에요!' 나답지 않게 조용히 '보험료 낼 돈이 없어요' 하니 '정말 없느냐'고 몇 차례 확인한 뒤에 해지해 주더라.

그러다 오늘. 라이나 생명보험의 전화를 다시 받았다. 예전에 라이나 보험을 들었던 적이 있지 않느냐고 확인하더니, 주어진 대본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시면 ...되구요. 자 놀라지 마세요. ....까지' 하는 식으로 말을 하는데, '놀라지 마세요'를 두 번이나 사용한 덕분인지 난 전혀 놀라지 않았다. 왠일로 오늘은 나답지 않게 거의 대본의 마지막이다 싶은 지점까지 전화를 끊지 않았다. (난 인터넷 가입전화 같은 것은 5초 안에 끊는다) 그러다 마침내 '지금은 보험에 가입할 생각이 없고, 필요하면 연락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조금 특이한 응답이 돌아온다. '(가입을) 좀 더 생각해보시겠다는 거죠?'

텔레마케터들은 '지금은 생각이 없다'고 하면 백이면 백 '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한다. 다시 질문을 해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 순간 떠오른 생각. 아, 요즘은 내 반응도 기록하는구나. 누가 그러더라. 텔레마케터는 1) 고객이 서비스에 가입할 경우, 2) 고객이 안내 대본(?)을 끝까지 들은 경우. 이렇게 두 가지 경우에 따라 수당을 받는다고. 나처럼 '우리 0000으로 인터넷을 바꾸시면...' 에서 싹뚝 잘라 '전 집에서 인터넷 안합니다' 하고 전화를 끊어버리면 주어진 대본도 전혀 읽지 못하는 셈이다.

혹시 여기에 3) 고객으로부터 가입을 고려해보겠다는 답변을 듣는다, 는 평가가 추가된 것일까? '관심 없습니다'하는 완벽한 거부의사를 듣는 것보다는 수당을 더 받기 때문에 '좀 더 생각해보겠다는 거냐'는 질문을 했던 거? '왜 이걸 되묻지?'하는 마음에 '네, 지금은 가입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끊고나니 아무 것도 아닌 이 질문이 되게 궁금해진다. 왜 되물었을까.


덧: 텔레마케터의 수당 지급 방식은 '어디서 들은 것'일 뿐, 전혀 근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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